티스토리 뷰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 작가가 2013년에 발표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2017년 원신연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감독판으로 새로 개봉되기도 한 이 작품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은퇴한 연쇄살인범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바탕으로 인간 기억의 불완전성과 도덕적 모호성을 심도 깊게 탐구합니다.
소설과 영화 모두 이 독특한 세계를 매력적으로 풀어냈지만, 매체의 특성에 따라 주요 설정과 서사, 캐릭터 해석, 결말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번 분석에서는 2025년 현재 관점에서 '살인자의 기억법'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을 세밀하게 비교하며 두 작품이 각각 어떻게 독자와 관객에게 다른 인상을 주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줄거리 전개 방식 차이
'살인자의 기억법' 원작 소설과 영화는 동일한 이야기의 골격을 공유하지만, 줄거리를 전개하는 방식에 있어 매우 뚜렷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소설은 철저하게 1인칭 시점, 즉 병수의 내면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병수는 알츠하이머성 치매라는 질병 탓에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고, 자신의 기억조차 신뢰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독자들은 병수의 불안정한 인식을 통해 현실을 조각조각 맞추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일종의 심리적 스릴을 경험하게 됩니다. 병수는 과거의 살인, 현재의 의심, 딸을 위협하는 존재에 대한 불안 속에서 끊임없이 현실을 왜곡하거나 착각하는데, 이 혼란이 소설의 몰입도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반면 영화는 매체 특성상 시청각적 수단을 통해 병수의 혼란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단순히 병수의 시점을 따라가기보다는, 화면 색조, 카메라 워크, 편집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관객에게 병수의 혼란을 체험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기억이 흐릿해질 때는 화면이 갑자기 흐려지거나, 이어지는 장면이 끊기는 연출을 통해 병수의 인지 장애를 시각화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지나친 혼란을 피하고자 관객에게 일정한 '힌트'를 제공하는 전략을 택합니다. 영화 속 병수는 소설 속 병수보다 기억과 현실의 구분이 조금 더 명확하고, 서사 또한 비교적 선형적으로 전개됩니다. 이는 관객이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병수의 내면적 혼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균형 잡힌 연출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결국 소설은 독자 스스로 서사를 해석하게 하는 반면, 영화는 병수의 심리와 현실 사이를 보다 명확히 조율하여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는 두 작품이 지향하는 감정선과 서사의 긴장감에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캐릭터 해석과 설정 차이
'살인자의 기억법' 소설과 영화는 주요 인물들의 성격과 설정에서도 눈에 띄는 차이를 보입니다. 병수라는 인물의 핵심적인 설정은 동일하지만, 그 해석 방식이 다릅니다.
원작 소설의 병수는 극도로 냉정하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과거 자신의 살인을 거의 죄책감 없이 회상하며, 자신의 살인 행위를 일종의 정당한 '정화' 행위로 여기기도 합니다. 치매로 인해 본능과 이성 사이의 균형이 무너진 병수는 점차 자신의 본성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성에 대한 냉혹한 질문을 던지며 소설 전체의 어두운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반면 영화 속 병수는 보다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면모를 부각합니다. 설경구 배우는 병수를 단순한 악인이 아닌, 죄의식과 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입체적 인물로 연기했습니다. 영화는 병수의 과거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현재 그가 겪는 심리적 고통과 딸을 지키려는 절박한 의지를 강조합니다. 이로 인해 관객은 병수에게 보다 쉽게 공감하게 되고, 그의 여정을 응원하게 됩니다.
또한, 딸 은희 역시 두 매체에서 상이하게 그려집니다. 소설 속 은희는 병수의 세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인물로, 능동적인 서사적 역할을 거의 수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은희가 보다 적극적인 캐릭터로 재창조됩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치매와 과거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사건 해결에도 능동적으로 개입합니다. 이 변화는 영화의 서사적 긴장감을 높이고, 딸과 아버지의 관계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듭니다.
적대적 인물인 민태주 형사 역시 변화가 큽니다. 소설에서는 전형적인 악당에 가까운 캐릭터지만, 영화에서는 그 또한 복잡한 과거와 동기를 가진 인물로 재해석됩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 보다 복합적인 인간 군상을 그리고자 합니다.
결말과 메시지의 차이
'살인자의 기억법'의 결말과 주제의식은 소설과 영화에서 극명하게 갈라집니다. 원작 소설은 병수의 혼란과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며 끝을 맺습니다. 병수는 자신이 실제로 딸을 구했는지, 아니면 모든 것이 망상에 불과한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소설을 마무리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병수의 불완전한 기억 속에서 반복되는 과거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으며, 독자는 끝내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이 결말은 인간 존재의 덧없음, 기억과 인식의 불확실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키며 깊은 허무감을 남깁니다.
영화는 보다 감정적으로 명확한 결말을 선택합니다. 병수는 여러 착오와 오해를 거치면서도 결국 딸 은희를 구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혼란스러운 기억 속에서도 딸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고 행동에 나서며, 이는 영화의 핵심 감정선을 이룹니다. 비록 병수는 치매로 인해 많은 것을 잃었지만, 영화는 그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를 지켰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영화는 엔딩 크레딧 이후 짧은 추가 장면을 통해 병수가 여전히 은희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는 단순한 가족애를 넘어, 인간이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사랑과 기억의 힘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각각 매체가 가진 특성과 대중의 기대를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했지만, 소설과 영화는 매체의 특성에 맞춰 전혀 다른 감정적 궤적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은 치밀하고 냉혹한 심리 묘사와 기억의 불확실성을 통해 독자에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집니다. 반면 영화는 인간적인 감정과 드라마를 강조하여 관객에게 강렬한 공감과 감동을 선사합니다.
두 작품 모두 각각의 매력과 강점을 지니고 있으며, 어느 하나를 통해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세계를 제시합니다.
아직 소설 또는 영화만 경험했다면, 꼭 두 작품 모두를 비교해보시길 추천합니다. 그리고 비교를 통해 인간 기억의 본질, 사랑과 죄책감의 무게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해보시길 바랍니다.